<목요철학 인문포럼> 40년 약사
1970년대 말부터 계명대학교 철학과는 유럽 각 지역과 미국, 그리고 대만으로부터 온 다양한 철학전공의 신진학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젊은 40대의 교수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가지고 선후임자 없는 철학과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한 자리에 모였으니 시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하게 표현하면 젊은 신진교수들이 학생들 앞에서 제각각 잘났다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철학적 이념논쟁(?)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이미 몇몇 교수들은 지역의 타 대학으로 이적한 상태였지만 1980년 미국에서 분석철학을 전공한 김영진 교수가 철학과에 새로 임용되면서 미국의 새로운 언어분석학을 가지고 유럽관념철학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으로 철학과를 흔들어 놨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바로 그해 1980년 1학기 말에 나는 학과 교수들이 모인 자리(변규룡, 김영진, 백승균)에서 “2학기부터 오전오후의 수업은 정규교과과정에 따라서 정상수업을 하고, 방과 후 <철학세미나>를 통해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자신이 내건 철학의 주제를 한 시간은 발표, 한 시간은 토론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변규용 교수와 김영진 교수가 동의하여 연장자 순서로 마침내 1980년 10월 8일(수)부터 <목요철학 세미나>를 시작하게 됐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1980년”이 갈림길이었다. 강좌의 방향은 흥미 위주가 아니라 학문 위주로 가되 정치ㆍ경제로 할 것인가 혹은 문화ㆍ사회로 할 것인가 이었다. 우리는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ㆍ사회로의 길을 택했고, 그 후 대학 내에서 30년 그리고 대학 밖 사회에서, 즉 대구시립중앙도서관에서 10여 년, 모두 40년을 “문화ㆍ사회”라는 한 길로 달려왔다. 물론 대학 내에서 30년 동안 이런저런 경우 정치적 성향의 강사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의 대학가에는 다양한 지적 욕구가 넘쳤다. 아쉽게도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공간과 주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교수들의 자기주장에 대한 비판과 토론에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역시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교수들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청강할 뿐이었다. 철학과에서마저도 교수는 판서하고 학생은 필기하는 것이 당시 대학 강의의 전부였을 정도였다. 따라서 강의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때로는 엄숙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대학 전체가 조용할 수밖에 없었고, 조용한 대학이 학구열이 높은 일류대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철학 자체는 암기과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명대학교의 <목요철학 세미나>는 대학사회에서 돌풍을 일으킬 만했고, 또한 교수들의 학문적 역량과 지적 여건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이규호 교육부장관은 전국 대학총장회의에서 “오늘날 지방대학의 교수 구성은 서울 소재의 대학들 이상임”을 강조하면서 계명대학교 철학과를 거명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 <목요철학 세미나> 행사로 대명동 캠퍼스의 수산관 대형강의실에서나 시청각실에는 수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복도까지 가득 메우기도 했고, 열띤 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80년대 당시 대학의 지적 호기심은 이미 2000년대 우리 사회 전체의 미래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이의 촉매 역할을 <목요철학 세미나>가 상당 부분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목요철학 세미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철학적 사유의 보편화을 위해서 “철학의 대중화와 대중의 철학화”를 모토로 대학생들만이 아닌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했고, 강좌 주제들과 강사들도 순수 철학을 넘어 응용 분야의 사회, 윤리, 문화 일반, 심지어는 생명복제 문제와 포스터모던 문제로까지 확대해 나갔다.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1980년 계명대학교 철학과의 40대 교수들 간의 철학적 논쟁으로부터 시작했으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와서는 철학적 사유를 보편화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썼고, 2010년대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계명-목요철학원”이 대학의 한 공식기관으로서 설립됨으로써 <목요철학 세미나>를 공개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목요철학 세미나>는 3원화하여 청소년을 위한 <철학인문강좌>와 대학인을 위한 <목요철학 콜로키움>, 그리고 일반시민을 위한 <목요철학 인문포럼>을 정례화하게 됐다. 특히 <목요철학 인문포럼>에는 국내학자들로서 김남두, 김기태, 김지하, 김하태, 김형효, 無觀스님, 박이문, 소흥렬, 손봉호, 송기숙, 엄정식, 염무웅, 윤사순, 윤평중, 이완재, 장회익, 정달용 신부, 정대현, 정홍규, 조동일, 한우근, 한종만, 현응스님, 황경식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강연했다. 외국인 학자들로서는 Geertsema, 크리스티안 슈테터, 유르겐 하버마스, 칼 오토 아펠, 빅토리오 회슬레,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헤어만, 피터 싱어 등 외국의 석학들도 함께 발표와 토론에 참여했다. 이미 전국의 언론매체에서는 ‘대구의 자랑거리’, ‘대구의 정신문화’, 심지어 ‘우리 시대의 금자탑’이라는 과분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 언론사에서는 여전히 “그들이 있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없다.”라고 했는가 하면, “대학의 한 학과가 그토록 오랫동안 세미나를 가져온 것은 전례가 없고, 여건이 열악한 지방대학에서 철학세미나를 28년이나 계속해 왔다는 데 경탄을 금할 수 없다.”고도 했다.
1980년 시작에서부터 2010년까지 30여 년 동안 <목요철학 세미나>의 주제들은 처음에는 철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대체적으로 서양철학 영역에 집중되었으나, 이후에는 사회, 문화, 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의 내용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의 중요한 주제들도 함께 다루게 됐다. 그밖에 국내외 여러 학자들에 의한 인문학 일반에 관한 주제들과 함께 사회, 종교, 교육 분야 등 인문학의 다양한 다른 영역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 <목요철학 세미나>는 대학과 사회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학문의 경계성마저 사라진 포스트모던시대 현실에서 대학 공간에만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대학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을 위한 새로운 사회를 향해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적 사유 활동을 체계적으로 대학 밖의 시민들과 함께 공유함이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안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하는 대학인들의 사고가 중요했지만, 대학 밖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의 삶이 더욱 중요했다. 또한 대학 내에서는 엄격한 전문성을 띤 철학 세미나를 통한 교수 자신들의 자기주장이 통했으나, 시민사회에서는 실천적 삶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각기 다른 계층의 소통의 장이 필요했다. 때문에 대학 밖의 사회에서 필요한 형식은 ‘자기’ 주장이 가능한 강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광장이어야 했고, 인간 삶의 현장을 체계적이고 다원적으로 바라보고 상호 소통이 가능한 형식이어야 했다. 비로소 지적 독자성의 자기주장에서 사회적 실천성의 ‘우리’ 주장이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의 패턴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실천적 개방성의 공간에서도 자기 주장은 열려있어야 하고 따가운 비판도 열려있어야 하며, 따라서 사람도 열려있어야 한다. 열려있는 삶의 현장에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현실적 앎이 우선이고 더불어 지적 이론으로 승화하는 데까지 이루어내야 했다. 이에 삶과 앎, 그리고 있음의 존재론 문제까지도 다함께 상정할 수 있는 시민적 담론의 장에서 철학적 사유를 통해 비판적 시민의 문화의식이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원동력을 마련해주기를 우리는 바랐다. 이러한 문화사적 사유능력은 결국 사람됨의 가치와 자유함의 가치를 위한 사회적 인성실현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게 될 것으로 믿었다.
2010년 <목요철학 세미나>가 개강한 지 30년 만에 <목요철학 인문포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대학 안의 닫힌 공간에서 대학 밖의 열린 사회광장으로 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시작됐다. 철학과 내에서는 설왕설래했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라 되돌아올 수 없는 바깥 외출을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간접적인 개인의 경험 정도로 정당화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1~2년으로 끝날 수 없는, 아니 수년이 걸릴 줄도 모르는 방대한 문화사적 인문학강좌를 그것도 혈기왕성하고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찬 제도권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대구시민 일반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무리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처음 예측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대구’라는 도시 자체가 전통적인 ‘교육도시’이고, 주변의 위성도시들(안동, 상주, 예천 등) 역시 역사적으로도 당당했던 ‘정신문화의 도시’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대구시민들의 무한정한 지적 잠재력을 우리는 인문정신의 기축으로 모아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결과적으로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과감히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사회적 공간으로 진출하면서 “대구에는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있습니다.”를 슬로건을 내걸고 대구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시민들은 대환영이었다.
마침내 2011년 2월 8일 계명대학교 대학 본부에서는 전체 교무회의에서 계명-목요철학원의 설립을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여 통과시킴으로써 종전의 한 학과 차원의 일을 공식기구의 업무로 승격했다. 이어 백승균 명예교수가 계명-목요철학원장으로 임명됐다. 마침내 계명-목요철학원은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 사회 및 기타 학술연구와 사회교육 등 각종 사업을 위해 설치된 계명대학교의 한 인성교육기관으로서 공식화됐다. 이로써 2011년 상반기에서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30년 동안의 계명대학교 내의 <목요철학 세미나>를 떠나 10여 년 동안 대학 밖의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인문학강좌를 공식적으로 시민들에게 진행할 수 있었다. 대학 공간이 또래집단을 위한 학문 공간의 대학인들로 구성돼 있다면, 사회공간은 삶의 현장을 위한 경험 공간의 시민들로 구성돼 있다. 같은 차원에서 대학이 교수와 학생을 위한 이상 공간으로서 학문의 장이라면, 사회는 시민 전체를 위한 현실 공간으로서 생활의 장이다. 따라서 대학이 학생들로 하여금 고도의 이론과 엄격한 사고과정을 요구하지만, 사회는 그러한 사고과정보다는 구체적인 대안과 결과를 요구한다. 대학에서의 미성숙성은 일종의 미덕으로서 수용되지만, 사회에서 미성숙성은 현실적 냉담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대학 밖이 우리 모두에게는 조심스러웠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잊히지 않는 기억은 처음 30년 만에 대구시민을 위한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대학의 좁은 공간을 떠나 대학 밖의 사회공간을 찾아 해매던 중 우동기 대구교육감 제안으로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서 첫 개강식을 했을 때이었다. 2011년 4월 14일(목) 오후 2시, 그날은 우리들에게는 초긴장의 순간이었다. 갓난아이가 밀려드는 바닷가 파도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작 첫날 250여 명을 훨씬 넘는 시민들의 참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문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 대한 대구시민들의 정서적 표현이었고, 적극적인 참여였다. 참으로 우리는 초빙강사님들에서부터 시민 한 분, 한 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예의를 다하고, 여력이 닿는 데까지 그때그때마다 지극정성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목요철학 인문포럼>의 첫 강사는 서울대학교 정진홍 명예교수로서 “종교는 좋은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이후 <목요철학 인문포럼>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매주 230여 명을 넘겨왔다. 더구나 COVID-19로 일정까지 연기시켰다가 새롭게 시도한 실시간방송에도 대구시민들의 지적 호기심과 열정은 대단했다. 온라인 실시간 방송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실시간 시청자 250여 명에 이르렀고, 누적조회수는 1200여 명이나 됐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참으로 열렬한 대구시민들의 지적 저력이 아닌가 싶었다. 이는 대학 밖에서도 대학의 지적 양심을 지키겠다는 우리 모두의 더 큰 다짐이 되기도 했다.
계명-목요철학원에서는 2014년도부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향연장으로서 <시민 인문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목요철학 인문포럼> 24회 강연이 모두 끝난 후 제25회차에 시민들이 직접 강사로 나서서 공개강의를 할 수 있도록 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2013년도 이후부터는 <목요철학 인문포럼>에 1년 총 24회 중 20회 이상 참석한 시민들에게 한 해의 이수증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시민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모여 ‘인문봉사단’이라는 이름의 자치회를 조직했다. 자치회에서는 상반기와 하반기의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자발적으로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한 해의 <목요철학 인문포럼>에 대한 회고담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하는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지난 40년 동안 한 회차도 거르지 않고 한결같이 열정으로 달려왔다. 앞으로 우리는 지난 40년을 밑거름으로 새로운 40년의 역사를 설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인간의 근원성을 지목해야 하고, 우리의 본래성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하루의 새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진면목과 면밀히 소통할 때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그때마다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삶이 그때마다 새로 생성되고, 우리 자신으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20. 10. 8.
계명-목요철학원장 백 승 균
<목요철학 인문포럼> 40년 약사
1970년대 말부터 계명대학교 철학과는 유럽 각 지역과 미국, 그리고 대만으로부터 온 다양한 철학전공의 신진학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젊은 40대의 교수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가지고 선후임자 없는 철학과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한 자리에 모였으니 시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하게 표현하면 젊은 신진교수들이 학생들 앞에서 제각각 잘났다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일종의 철학적 이념논쟁(?)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이미 몇몇 교수들은 지역의 타 대학으로 이적한 상태였지만 1980년 미국에서 분석철학을 전공한 김영진 교수가 철학과에 새로 임용되면서 미국의 새로운 언어분석학을 가지고 유럽관념철학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으로 철학과를 흔들어 놨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바로 그해 1980년 1학기 말에 나는 학과 교수들이 모인 자리(변규룡, 김영진, 백승균)에서 “2학기부터 오전오후의 수업은 정규교과과정에 따라서 정상수업을 하고, 방과 후 <철학세미나>를 통해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자신이 내건 철학의 주제를 한 시간은 발표, 한 시간은 토론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변규용 교수와 김영진 교수가 동의하여 연장자 순서로 마침내 1980년 10월 8일(수)부터 <목요철학 세미나>를 시작하게 됐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1980년”이 갈림길이었다. 강좌의 방향은 흥미 위주가 아니라 학문 위주로 가되 정치ㆍ경제로 할 것인가 혹은 문화ㆍ사회로 할 것인가 이었다. 우리는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ㆍ사회로의 길을 택했고, 그 후 대학 내에서 30년 그리고 대학 밖 사회에서, 즉 대구시립중앙도서관에서 10여 년, 모두 40년을 “문화ㆍ사회”라는 한 길로 달려왔다. 물론 대학 내에서 30년 동안 이런저런 경우 정치적 성향의 강사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의 대학가에는 다양한 지적 욕구가 넘쳤다. 아쉽게도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공간과 주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교수들의 자기주장에 대한 비판과 토론에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역시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교수들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청강할 뿐이었다. 철학과에서마저도 교수는 판서하고 학생은 필기하는 것이 당시 대학 강의의 전부였을 정도였다. 따라서 강의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때로는 엄숙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대학 전체가 조용할 수밖에 없었고, 조용한 대학이 학구열이 높은 일류대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철학 자체는 암기과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명대학교의 <목요철학 세미나>는 대학사회에서 돌풍을 일으킬 만했고, 또한 교수들의 학문적 역량과 지적 여건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이규호 교육부장관은 전국 대학총장회의에서 “오늘날 지방대학의 교수 구성은 서울 소재의 대학들 이상임”을 강조하면서 계명대학교 철학과를 거명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 <목요철학 세미나> 행사로 대명동 캠퍼스의 수산관 대형강의실에서나 시청각실에는 수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복도까지 가득 메우기도 했고, 열띤 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80년대 당시 대학의 지적 호기심은 이미 2000년대 우리 사회 전체의 미래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이의 촉매 역할을 <목요철학 세미나>가 상당 부분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 <목요철학 세미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철학적 사유의 보편화을 위해서 “철학의 대중화와 대중의 철학화”를 모토로 대학생들만이 아닌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했고, 강좌 주제들과 강사들도 순수 철학을 넘어 응용 분야의 사회, 윤리, 문화 일반, 심지어는 생명복제 문제와 포스터모던 문제로까지 확대해 나갔다.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1980년 계명대학교 철학과의 40대 교수들 간의 철학적 논쟁으로부터 시작했으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와서는 철학적 사유를 보편화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썼고, 2010년대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계명-목요철학원”이 대학의 한 공식기관으로서 설립됨으로써 <목요철학 세미나>를 공개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목요철학 세미나>는 3원화하여 청소년을 위한 <철학인문강좌>와 대학인을 위한 <목요철학 콜로키움>, 그리고 일반시민을 위한 <목요철학 인문포럼>을 정례화하게 됐다. 특히 <목요철학 인문포럼>에는 국내학자들로서 김남두, 김기태, 김지하, 김하태, 김형효, 無觀스님, 박이문, 소흥렬, 손봉호, 송기숙, 엄정식, 염무웅, 윤사순, 윤평중, 이완재, 장회익, 정달용 신부, 정대현, 정홍규, 조동일, 한우근, 한종만, 현응스님, 황경식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당대의 지성인들이 강연했다. 외국인 학자들로서는 Geertsema, 크리스티안 슈테터, 유르겐 하버마스, 칼 오토 아펠, 빅토리오 회슬레, 슬라보예 지젝, 페터 슬로터다이크, 헤어만, 피터 싱어 등 외국의 석학들도 함께 발표와 토론에 참여했다. 이미 전국의 언론매체에서는 ‘대구의 자랑거리’, ‘대구의 정신문화’, 심지어 ‘우리 시대의 금자탑’이라는 과분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 언론사에서는 여전히 “그들이 있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없다.”라고 했는가 하면, “대학의 한 학과가 그토록 오랫동안 세미나를 가져온 것은 전례가 없고, 여건이 열악한 지방대학에서 철학세미나를 28년이나 계속해 왔다는 데 경탄을 금할 수 없다.”고도 했다.
1980년 시작에서부터 2010년까지 30여 년 동안 <목요철학 세미나>의 주제들은 처음에는 철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대체적으로 서양철학 영역에 집중되었으나, 이후에는 사회, 문화, 예술 등의 다양한 분야의 내용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의 중요한 주제들도 함께 다루게 됐다. 그밖에 국내외 여러 학자들에 의한 인문학 일반에 관한 주제들과 함께 사회, 종교, 교육 분야 등 인문학의 다양한 다른 영역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서 <목요철학 세미나>는 대학과 사회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학문의 경계성마저 사라진 포스트모던시대 현실에서 대학 공간에만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대학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을 위한 새로운 사회를 향해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적 사유 활동을 체계적으로 대학 밖의 시민들과 함께 공유함이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안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하는 대학인들의 사고가 중요했지만, 대학 밖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의 삶이 더욱 중요했다. 또한 대학 내에서는 엄격한 전문성을 띤 철학 세미나를 통한 교수 자신들의 자기주장이 통했으나, 시민사회에서는 실천적 삶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각기 다른 계층의 소통의 장이 필요했다. 때문에 대학 밖의 사회에서 필요한 형식은 ‘자기’ 주장이 가능한 강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광장이어야 했고, 인간 삶의 현장을 체계적이고 다원적으로 바라보고 상호 소통이 가능한 형식이어야 했다. 비로소 지적 독자성의 자기주장에서 사회적 실천성의 ‘우리’ 주장이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의 패턴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실천적 개방성의 공간에서도 자기 주장은 열려있어야 하고 따가운 비판도 열려있어야 하며, 따라서 사람도 열려있어야 한다. 열려있는 삶의 현장에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현실적 앎이 우선이고 더불어 지적 이론으로 승화하는 데까지 이루어내야 했다. 이에 삶과 앎, 그리고 있음의 존재론 문제까지도 다함께 상정할 수 있는 시민적 담론의 장에서 철학적 사유를 통해 비판적 시민의 문화의식이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원동력을 마련해주기를 우리는 바랐다. 이러한 문화사적 사유능력은 결국 사람됨의 가치와 자유함의 가치를 위한 사회적 인성실현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게 될 것으로 믿었다.
2010년 <목요철학 세미나>가 개강한 지 30년 만에 <목요철학 인문포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대학 안의 닫힌 공간에서 대학 밖의 열린 사회광장으로 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시작됐다. 철학과 내에서는 설왕설래했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라 되돌아올 수 없는 바깥 외출을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간접적인 개인의 경험 정도로 정당화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1~2년으로 끝날 수 없는, 아니 수년이 걸릴 줄도 모르는 방대한 문화사적 인문학강좌를 그것도 혈기왕성하고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찬 제도권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저 평범한 대구시민 일반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무리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처음 예측은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대구’라는 도시 자체가 전통적인 ‘교육도시’이고, 주변의 위성도시들(안동, 상주, 예천 등) 역시 역사적으로도 당당했던 ‘정신문화의 도시’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대구시민들의 무한정한 지적 잠재력을 우리는 인문정신의 기축으로 모아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결과적으로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과감히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사회적 공간으로 진출하면서 “대구에는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있습니다.”를 슬로건을 내걸고 대구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시민들은 대환영이었다.
마침내 2011년 2월 8일 계명대학교 대학 본부에서는 전체 교무회의에서 계명-목요철학원의 설립을 정식 안건으로 채택하여 통과시킴으로써 종전의 한 학과 차원의 일을 공식기구의 업무로 승격했다. 이어 백승균 명예교수가 계명-목요철학원장으로 임명됐다. 마침내 계명-목요철학원은 철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 사회 및 기타 학술연구와 사회교육 등 각종 사업을 위해 설치된 계명대학교의 한 인성교육기관으로서 공식화됐다. 이로써 2011년 상반기에서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30년 동안의 계명대학교 내의 <목요철학 세미나>를 떠나 10여 년 동안 대학 밖의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인문학강좌를 공식적으로 시민들에게 진행할 수 있었다. 대학 공간이 또래집단을 위한 학문 공간의 대학인들로 구성돼 있다면, 사회공간은 삶의 현장을 위한 경험 공간의 시민들로 구성돼 있다. 같은 차원에서 대학이 교수와 학생을 위한 이상 공간으로서 학문의 장이라면, 사회는 시민 전체를 위한 현실 공간으로서 생활의 장이다. 따라서 대학이 학생들로 하여금 고도의 이론과 엄격한 사고과정을 요구하지만, 사회는 그러한 사고과정보다는 구체적인 대안과 결과를 요구한다. 대학에서의 미성숙성은 일종의 미덕으로서 수용되지만, 사회에서 미성숙성은 현실적 냉담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대학 밖이 우리 모두에게는 조심스러웠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잊히지 않는 기억은 처음 30년 만에 대구시민을 위한 <목요철학 인문포럼>이 대학의 좁은 공간을 떠나 대학 밖의 사회공간을 찾아 해매던 중 우동기 대구교육감 제안으로 대구시립 중앙도서관에서 첫 개강식을 했을 때이었다. 2011년 4월 14일(목) 오후 2시, 그날은 우리들에게는 초긴장의 순간이었다. 갓난아이가 밀려드는 바닷가 파도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작 첫날 250여 명을 훨씬 넘는 시민들의 참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문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 대한 대구시민들의 정서적 표현이었고, 적극적인 참여였다. 참으로 우리는 초빙강사님들에서부터 시민 한 분, 한 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예의를 다하고, 여력이 닿는 데까지 그때그때마다 지극정성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목요철학 인문포럼>의 첫 강사는 서울대학교 정진홍 명예교수로서 “종교는 좋은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이후 <목요철학 인문포럼>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의 수는 매주 230여 명을 넘겨왔다. 더구나 COVID-19로 일정까지 연기시켰다가 새롭게 시도한 실시간방송에도 대구시민들의 지적 호기심과 열정은 대단했다. 온라인 실시간 방송이 진행되는 2시간 동안 실시간 시청자 250여 명에 이르렀고, 누적조회수는 1200여 명이나 됐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참으로 열렬한 대구시민들의 지적 저력이 아닌가 싶었다. 이는 대학 밖에서도 대학의 지적 양심을 지키겠다는 우리 모두의 더 큰 다짐이 되기도 했다.
계명-목요철학원에서는 2014년도부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향연장으로서 <시민 인문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목요철학 인문포럼> 24회 강연이 모두 끝난 후 제25회차에 시민들이 직접 강사로 나서서 공개강의를 할 수 있도록 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2013년도 이후부터는 <목요철학 인문포럼>에 1년 총 24회 중 20회 이상 참석한 시민들에게 한 해의 이수증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시민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모여 ‘인문봉사단’이라는 이름의 자치회를 조직했다. 자치회에서는 상반기와 하반기의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자발적으로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한 해의 <목요철학 인문포럼>에 대한 회고담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하는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지난 40년 동안 한 회차도 거르지 않고 한결같이 열정으로 달려왔다. 앞으로 우리는 지난 40년을 밑거름으로 새로운 40년의 역사를 설계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인간의 근원성을 지목해야 하고, 우리의 본래성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하루의 새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의 진면목과 면밀히 소통할 때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그때마다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삶이 그때마다 새로 생성되고, 우리 자신으로서 새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20. 10. 8.
계명-목요철학원장 백 승 균